친일파 문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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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1-0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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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49년 3,4월에 안두희가 --안두희뿐만 아니라 안두희의 직속상관인 포병사령관 장은산 중령이 거느리고 있던 김구암살대만 하더라도 여러 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 김구를 암살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고 결국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암살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앞에서 김구 선생이 많은 테러에 관련되어 있다가 테러로 돌아가신 분이고, 친일파문제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해서 친일파 문제로 돌아가신 분이라고 얘기했는가 하는 점을 얘기해 보도록 하죠. 김구 선생이 해방 이전에 일제에 대해 테러를 쓴 것은 구국의 혈성이 담긴 애국행위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이 1945년 11월 23일 중경임정요인 제 1진으로 귀국했을 당시에는 선생이 민족대통합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해외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애국활동을 한 분이기 때문에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고 미군정에 붙어 여우 같은 반민족행위를 저질러 민족을 분열로 몰아가고 있던 친일파의 처단문제에 대해 적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에 한독당이 관계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고, 1945년부터 1946년 초에 한독당 관계 행동대들이 북쪽에 올라가서 테러행위를 한 것으로 얼마 전 [중앙일보]에 연재되었고, 서북청년회나 전학련 등 테러와 관련있는 청년학생단체 관계자들이 쓴 기록에서도 그들을 후원한 사람들로 이승만과 김구가 꼽히고 있습니다. 신문에서도 그런 것을 바라는 기사가 났죠. 그러나 백범이 귀국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한 대답은 그러한 기대들과 거리가…(생략(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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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에 이승만의 양해 또는 이승만과의 교감하에 권력의 핵심부문에서 김구를 죽이려는... , 친일파 문제에 대하여인문사회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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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에 이승만의 양해 또는 이승만과의 교감하에 권력의 核心(핵심)부문에서 김구를 죽이려는...
설명
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테러를 정치 활동의 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에 이승만의 양해 또는 이승만과의 교감하에 권력의 핵심부문에서 김구를 죽이려는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그 다음에 김구 선생은 귀국한 이우 친일파 문제에 마주향하여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