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崔恒)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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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2-02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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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은 어떤 일에 임(臨)해서는 과단성 있게 재결(裁決)함이 적었다. 최명재, ꡔ훈민정음과 최항선생ꡕ, 정문당, 삭녕최씨유사연구원, 1997 p.112-121.
그러나 그의 성격을 다르게 평가하면 우유뷰단하며 보수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중시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china(中國) 조정(朝廷)에서까지도 정절(精切)하다고 평을 하였으며, 세조(世祖)·예종(睿宗)의 《실록(實錄)》과 《무정보감(武定寶鑑)》·《경국대전(經國大典)》은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다.” 성종 041 05/04/28(임오) / 좌의정 최항의 졸기
그의 성품을 살펴보면 겸손 정직였고 과묵하였으며 비록 한 더위에라도 의관을 정제하여 무릎을 괴고 앉아 종일토록 흐트러짐이 없었고 학문을 좋아하여 독서를 탐닉하였으며 기억력이 비상하였다고 한다.
그는 집현전에서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와 동국정운, 자치강목, 통감훈의, 동국통감, 경국대전 등 국가통치의 근간이 되는 많은...
그는 집현전에서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와 동국정운, 자치강목, 통감훈의, 동국통감, 경국대전 등 국가통치의 근간이 되는 많은 저술을 비롯하여 용비어천가 등 40여권을 찬술하였으며 각종 시와 문에 능통하였다. 문집에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등이 있다아 이런 문학적인 천재성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문정(文靖)이라고 시호(諡號)하니 ꡐ도덕(道德)이 높고 박학다문(博學多聞)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전조(銓曹)의 장(長)이 되고 상…(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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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부친의 거상중에 기복출사의 명을 거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문장(文章)으로는 대우(對偶)에 능하여 한때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한 그는 악장가사등의 작사능력도 뛰어나 당시 임금은 그를 진천재나 유웅으로 평가했다. 이처럼 그는 조선 초기의 훈구파(勳舊派)의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공헌했으며, history ·언어 등의 분야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의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도맡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