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 20년대 안동의 사회와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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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1-10 02:38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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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국인 자본의 육성을 억제하고자 했던 당시 일제 식민지통치의 기본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공업정책은 ‘회사령’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거의 전무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생략(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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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자연과학
5장-1910·20년대안동의사회와항일투쟁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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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등기제도와 같이 사유권을 법제적으로 보장하는 증명제도가 불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에 농민층의 여러 권리가 부착되어 있었다. 회사의 설립을 조선총독의 허가 사항으로 규정한 회사령은 한국의 공업화에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편 일제는 ‘회사령’을 비롯한 여러 가지 법령을 통해 민족산업을 억압하였다. 물론 조선 말기에도 이미 토지 사유권이 확립되어 있어서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은행의 경영 의도와 저촉되지 않는 극소수의 기업만이 활동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1911년 공포된 ‘조선광업령’과 ‘조선어업령’ 등은 한국인들의 경영을 각종 규제를 통해 억제하는 한편, Japan자본의 한국 지출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광업과 어업을 사실상 Japan인 중심으로 재편성하였다. 이렇게 탈취된 토지는 상당 부분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Japan인에게 불하되었는데, 이러한 Japan인 지주의 증가는 식민통치의 첨병역할을 하였다.
1910 20년대 안동의 사회와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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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래의 목적은 종래 한국의 전근대적인 토지소유관계 대신 일제 자본의 토지 점유에 적합한 토지소유 증명제도를 확립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토지, 특히 국유지를 총독부 소유로 귀속시키는 데 있었다. 이로써 일제 자본의 토지 점유를 용이하게 하는 한편,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침투하여 많은 양의 토지를 집적하고 있었던 일제 자본의 토지 점유를 합법화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일제는 철도·도로·통신의 정비에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한국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Japan 군부와 그들의 influence(영향) 아래 있었던 조선총독부 주체들의 식민통치 방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토지의 사유권에 있어서 지주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농민의 권리는 모두 배제시켰다.